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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에서는 햇볕도 어제 내린 눈에 미끄러져 있다. 밟고 지나야 한다면, 접질린 약속이 떠올라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 내일을 돌려주겠다는 마음을 생각해 본다. 지나고 나면 빙판길일 텐데 감정을 앞세운다는 게. 가끔 그 무모함이 나를 경과해 어김없이 끝을 일러준다. 사람에게 미끄러져 본 적 있었던가. 그게 영하 10도, 타인이 마이너스 기호로 표기될 때다.
추운 날은 핫팩 하나가 주머니에 있어서 먼 길도 다정해진다. 패딩 왼쪽 주머니에서 오른쪽으로 넘어가기까지 시간도 정분이 두텁다. 모두 넘어질까 봐 뒤뚱뒤뚱 보폭을 좁히는 그늘 자리, 그 담장 아래 봄날 민들레가 핀다는 걸 안다. 어디서든 다정은 다감하다. 패딩을 벗어 놓고 일을 하다 몇 시간 뒤 다시 입을 때까지 주머니에서 오롯이 온기로 기다려주는 늦은 오후. 흰 갓털이 달린 눈송이가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전철 좌석에서 패딩 입은 학생과 어르신 사이 내가 끼어 앉아 덜컹덜컹 가다 보면 양옆이 꿈도 완충해 준다. 이다지도 폭신한 무의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와도 핑크뮬리 들녘이라니. 그렇게 좋았나, 분홍색이 감은 눈에 비춰올 때. 차창에서 햇볕이 솨솨 불어와 눈두덩이에 닿는다. 몇 정거장 더 가게 되면 눈은 저절로 떠질 것이지만, 학생도 졸고 어르신도 졸고 나도 졸고. 도심에서 벗어나는 빈 손잡이들만 한쪽으로 쏠렸다가 멈춰, 꿈속 너를 태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