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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

2025.11.12 14:45

윤성택 조회 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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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연인이 주말 무렵 내 눈을 찾아와 머물다 가곤 한다. 매번 다른 얼굴이지만 물이 귀하고 산이 말을 걸어오는 건 언제나 비슷하다. 나도 저쯤에서 살면 어떨까, 아직도 어느 계곡에 내가 살만한 집터 하나쯤 남아 있을 라나. 그러다 오감이 먼저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벗어나 산을 오르고 있는 걸 느낀다. 몸을 두고 나에게서 한없이 멀어지고 싶구나.

 

편하지요, 가만히 있어도 푸근합니다. 세상일은 장작과 패여 밑불로 활활 타고 있고, 굴뚝 흰 연기가 자신만의 왕국 국기처럼 나부낄까. 전기는 들어오는지, 인터넷은 되는지, 화장실은 좀 깨끗해야 되지 않겠어? 이렇게 물어보는 내 안의 어떤 소리. 오감이 벌써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하는 말. 살 만한 사람에게만 그만저만 살 만할 것 같더라고. 산도 사람을 가린다고.

 

자연인은 사회에 속박되지 아니한,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라지. 그런데, 있는 그대로라는 게 뭘까. 화면 속 자연인도 카메라 앞에서 점심을 차리고, 약초를 캐고, 웃음을 짓는다. 그게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아니면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연인의 모습일까. 북적하던 스태프와 장비가 모두 빠져나간 밤. 적막이라는 고정 채널에 자신을 맞춰 놓고 스르르 잠드는지.

 

어쩌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방식을 훗날에는 자연인이라 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공기를 쐬지 않냐, 창문을 열면 하늘이 보이지 않냐, 비가 오면 젖지 않냐고. 지구 자체가 다큐멘터리가 되어 조각조각 흩어진 소행성대에서 방영되고 있지는 않을까. 벗어나지 못할 인력(引力) 안에서 부서진 채 부유하는 기계들. 인간이 모두 사라진 전파의 잔해 속에서 쓸쓸히 우주가 편성한 콘텐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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