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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4. 15:53. 자유게시판. 제목 : 메리 크리스마스!
눈 대신 안개가/ 나무와 나무 사이/ 산과 산 사이/ 소복하게 내렸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참 색다른/ 성탄전야인 것 같네요. 메리 크리스마스!
이 애물단지 홈페이지를 이십 년이 넘게 유지하고 있는 건 지금 내 의지인가, 미래의 내가 묻어둔 암시인가, 2003년 12월 24일 오후 3시 53분, 그 순간의 결정인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이 연결된 '닫힌 시간꼴 곡선(Closed Timelike Curve, CTC)'이라는 게 있다지. 이론대로라면, 2003년 그 시공간, 초 단위까지 정확히 맞춰 타임 루프로 되돌아갈 수도 있겠다.
기록이란 후일에 남길 목적도 되지만 미래가 점지해 놓은 좌표도 된다. 내일 찾아올 한파가 지금 시베리아 바이칼 호숫가 삼나무 숲에서 삭정이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도, 조르가르트니세캬 와인이 진열장 구석에서 병 속 산소와 섞여 내일의 나를 기다리는 것도, 미래가 과거에 심어둔 설계가 아닐까.
신(神)도 그랬지. 삶에는 목적이 있다고, 그 방향에서 사랑이 완성된다고. 내가 나일 수 있는 건 아니, 나여야만 하는 건 매해 캐럴을 듣고 또 들어도 설레는 일일 테니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가, 현재를 외면하는 불상사를 감당해야겠고.
안개 낀 성탄절 전야, 뜻밖에도 영상 4도인 크리스마스 전날. 이 두 24일이 더벅머리 한 사내를 내통해 준다면 혹시 오늘 밤 그 안개가 도착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어느 플라타너스 아래 마주쳐서 하루만, 이십여 년 전 마음을 빌리고 싶다. 그 사내의 미래는 온통 새하얗게 떠 있는 작은 물방울일 테니. 그 어떤 고민도 연민도 다중우주 세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다시 적어간다. 오늘, 이 게시판에. 또 먼 미래가 다녀가도록. 아니 수백 년 뒤 지구 공기가 불현듯 물방울이 되어 정전기가 일도록. 영혼의 네트워크가 접속되도록. 아, 구동되는 크리스마스. 활성화되는 성탄절. 메리 크리스마스.
2025.12.24. 14:29. 시작메모 게시판. 제목 :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