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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안으로 마구 들이치는 빗줄기가 왼쪽 소매를 타고 내려간다. 나는 그것을 본다기보다 그것과 함께 스며드는 중이다. 여름비로 여름은 가장 여름다워진다. 완전히 젖어들 수도, 마를 수도 없는 그 중간에서 비를 본다.
스며드는 쪽이라는 게 나를 지나가게 둬버리는 건 아닌가. 그 어떤 젖어 드는 것이 물러나지 않는 나를 점령해서 동일한 속성을 갖게 하는 거. 스며드는 건 곧 닮아가는 일이고, 닮아가는 건 나를 잃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쩌면 내가 나로 남아있는 유일한 방식.
비가 내려서 눈보다 감정이 먼저 젖고, 감정이 먼저 젖어야 눈빛도 촉촉해지는 법이라 나는 어느새 창밖을 내다보며 비보다 마음이 앞선다. 그런 날이다. 날씨가 마음을 앞질러 가는.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혀 여러 갈래 흩어지는 걸 보며, 나도 그렇게 무언가의 기로였던 적이 있었다는 걸 문득 안다.
번들거리는 우산을 계단 구석에 펼쳐 세워둔다. 그 물기를 완전히 털어내지 않는 건 오늘 비를 빌려 내가 아닌 나로 젖어봤기 때문. 누구나 쉽게 마르지 않는 쪽에 그리움을 놓아두기도 한다. 젖는 동안이 유예라면 증발은 그 감정을 되가져 가는 수순이므로.
망각이란 기억이 더 이상 같은 얼굴을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 비는 내려서 어딘가에 묻어 시간차로 얼룩을 만든다. 느닷없이 도착한 생각이 손수건을 떠올리는 건 내가 접힌 채로 그날에 있었기 때문이다. 망각은 그 꽃무늬다.
빗소리는 좋은데 너무 내린다 싶다. 너무 좋아서 두려운 그런 상황처럼. 갑자기 강수량이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곳에 내린 마음으로 보인다. 낮은 곳으로 쉴 새 없이 내려서는 물길이 더 무서운 유속을 지닐 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저수량을 생각한다. 터주는 게, 보내주는 거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