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가 반 옥타브쯤 높은 사람을 알았던 적이 있다. 내 기준보다 들뜬 음정을 듣는 귀로 차감하고 나면, 의외로 차분한 속내가 저음역대였다. 이걸 알게 되기까지 능히 헤아릴 줄 알았던 몇 계절이 흘렀다. 공중으로 풀풀 날리는 벚꽃과 바람 속에서 가라앉지 않은 낙엽이 오버랩되는 인상이랄까. 어릴 적 바위에서 연을 하늘 높이 띄운 다음 얼레를 돌 틈에 끼워놓고 깜빡 낮잠 잤던 일이 떠오른다. 그이도 따르르 연줄을 풀어가다 더 멀리서 환청처럼 나울나울, 그러다 끊긴 목소리. 그렇게 바람 부는 날이다.
허스키로 노래를 불렀던 가수였는데 이제는 TV에서 트로트를 구성지게 꺾는다. 나는 그게 왜 못마땅해서 채널을 돌렸을까. 변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일 뿐인데. 시간은 적응이면서 배반이다. 누군가를 옛일에 묶어두었다가 슬그머니 풀어준다는 게 미래에 빌붙는 일인가도 싶다. 사분의 사 박자의 날들이 가고 있다. 이런 신파가 좋았던 목소리를 골라내 안부를 헤아린다. 지금도 그대로인 마음, 쉰 게 아니어서 맑다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를 좋아할 수 있는 이는
필체로 상대를 드나들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만든다.
이것을 라디오라고 알아듣는다면 귀애한 사람이고
편지라고 보아준다면 보귀한 사람이다.
귀애와 보귀 사이로
몇 옥타브가 넘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