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경기를 보러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관계자들이 가방을 뒤지고 있다. 주류를 찾는다, 반입이 금지된. 고래고래 내지르는 이들은 대체로 경기장에서 주류에 취한 주류인데, 나는 비주류의 기분으로 가방을 열어 보인다. 텀블러 속에는 커피가 들어 있지요, 아니 와인일지도 모르고요. 이러저러한 궁리가 벌써 좌석에 궁둥이를 내려놓게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경기장 안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가 투명 플라스틱 컵에 담긴 채 여기저기 눈에 띈다. 나도 편의점을 가방에 넣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캬. 와인을 마시면서 이런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상술을 상술하면 경위야 어떻든 취한 자들의 리그다.
볼펜을 잠깐 빌려 달라고 했더니 가방 속을 뒤지는 손. 밑바닥에 깔려 있는지 얹힌 이것저것을 테이블에 꺼내놓는다. 찾을 때까지 헤쳐낼 것 같은데 왠지 봐야 할 걸 미리 보는 느낌이다. 사소하게 꺼내놓은 물건마다 메시지가 있다. 시집 한 권이 있으니 손이 귀한 문학의 독자(獨自)시다. 나는 무엇을 적으려 했던가. 빌린다는 게 오래 사시라고 빌고만 싶어져서. 돋보기 안경집이 유난히 빛났다. 창밖 구름의 지퍼가 열리고 햇볕이 쏟아지고 있을 때였다.
봄은 이제쯤 가방을 열고 이팝이나 등꽃을 꺼내겠지. 마술사의 가방에서 흰 비둘기가 계속 나오는 것처럼 근사한 상상도 무언가를 꺼내 오는 방식이 아닐까. 너의 머릿속은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말이. 검지를 관자놀이 가까이 대고 빙빙 돌리는 시늉이. 모두 가방론적 아방가르드였으니.
지퍼를 열고
가방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잠갔던 날들이
여태 나를 찾고 있다.
나는 흠씬 봄에 취해서 모른다.